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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트> 자해 공갈범

在綠 2006. 11. 17. 18:58

 ※ 2006년 울산공업축제 문학상 응모 당선작

 

<콩트>    자해 공갈범

 

                                        현대중공업 엔진영업기획부 차장  배 재 록


남들은 즐거운 열흘간의 여름휴가라고 도망치듯 울산을 벗어났지만 H중공업

엔진조립부에 근무하는 저는 올 휴가만큼은 옴짝달싹 하지 않고 쭉~ 집에서

독서삼매경을 하면서 보내기로 작정 했습니다. 고3인 딸아이 곁에서 힘이

되어주고 오랜만에 아빠 노릇을 제대로 해 볼 심상도 있었지요.

휴가 첫날부터 70년 만에 찾아 온 살인적인 더위로 고행을 격어야 했습니다.

미리 구입 해둔 도서로 독서삼매경에 몰입 하려고 용을 썼는데 글쎄 시작한지

3시간도 못 참고 팔자 좋은 낮잠이나 자는 꼬락서니가 되고 말았으니 스스로가

생각을 해도 한심 했습니다.

더위 때문에 잠도 깊이 못자 선잠을 깨고 나면 오른 쪽으로 누워서 2시간,

왼쪽으로 누워서 2시간, 발딱 누워서 1시간 나뒹구는 겁니다.

그러다가 허리가 아프면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슬리퍼를 신고 마당으로 내려가

수도꼭지에 끼워진 물 호스로 마당 전체에 물을 한 번 뿌린 뒤, 허리 몇 바퀴

돌리고 들어와서 다시 자세를 취하고 책을 읽지만 이내 싫증이 났습니다.

 


하다못해 컴퓨터를 켜서 인터넷 블로그(Blog)를 뒤지며 재미난 글도 읽고,

내가 가입한 카페를 속속들이 방문해서 운 좋게 접속되는 여자들에게 쪽지도

보내고, 황당어(ex : 휆, 츩픽)와 이모티콘(ex : d^d, ^**^) 일색의 채팅도

해보지만 자칭 훈남인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서툰 타자 솜씨에 실망한 여자들이

즐팅(너나 즐기라는 거부의사) 하라며 도망치듯 화면에서 빠져 나가버렸습니다.

홀로된 기분으로 성인용 섹티즌(성인물)과 Rec(동영상)족을 상대 했지만 역시

퇴짜를 맞고 나니 이번에는 자존심까지 상했습니다.

오기가 나서 포털 사이트를 방문했는데 게시판 마다 S자동차 노동조합 비판이

일색이라 나도 덩달아서 한마디 거들었는데 글쎄 읽기 역겨운 욕설로 호되게

기분만 상하고 줄행랑을 치듯이 빠져 나와야 했습니다.


아예 컴퓨터를 꺼 버리고 텔레비전 앞으로 다가가 리모컨을 꼭 쥐고

이리 저리 채널을 돌리다 졸려서 TV를 켜둔 채 새우잠에 빠져 버렸습니다.

잠은 왜 그렇게 쉽게 오고 쉽게 깨버리는지 TV에서 들려오는 괴성에 놀라

화들짝 잠에서 깨 영화를 한편 보다가 시시해서 채널을 돌려 개그맨들이 나와서

농담 따먹는 프로를 보면서 내 자신이 낄낄대며 별난 연기를 하는 거 있죠.

영변아가씨의 미모에 반해 푹 빠져버린 <열아홉 순정>에 이어 계속되는 9시 

뉴스를 보면서 비리로 얼룩진 나라님들에게 속이 다 후련해지도록 욕이나

한바탕 실컷 해주고 나서야 입맛도 잃고 때를 놓친 저녁을 먹었습니다.

관절이 불편한 아내의 무릎을 만져주며 슬픈 드라마를 보는데 요즘 애들이

말하는 안습 (안구에 습기 차다)에 젖어 아내에게 조롱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내참 괜스럽게 실컷 울고 싶은 충동이 생기는 거 있죠.

딸아이가 밤늦게 귀가해 올 때까지 TV를 보다가 할일이 없어 잠을 잤습니다.

 


둘째 날이 되자 불덩이 같은 햇살이 더위를 싣고 와 마당의 초목들을 힘없이

눕히기 시작하더니 반나절도 안 되서 집안까지 진출 해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거실에 벌렁 누워 뱃가죽 훌떡 걷어 제치고 선풍기 바람을 쏘이며 헥헥 거리자

하루 늦게 휴가를 받은 전업 주부인 아내가 집안일을 마치자 말자 이를 보다

못해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고 아내의 등살에 못 이겨서 회사에서 제안 포상으로

받은 현대예술관 영화 티켓으로 요즘 인기가 절정인 '괴물' 영화를 보러 갔지요.

번잡했던 거리와 붐비던 영화관에는 사람이 적어 썰렁한 분위기였지만 실내에는

시원한 에어컨이 켜져 있어서 기분이 상쾌하기 까지 했습니다.

소문처럼 그렇게 흡족하지 않은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오는데 어떤 쓸개가

빠진 인간인지 내 차가 못 빠지게 주차시켜 놓았지 뭡니까.

한참을 기다리자 그 인간이 처자식하고 같이 나타난 겁니다. 내가 나무라듯이

한마디를 했더니 미친 녀석인지 아니면 얼이 빠졌는지 새파랗게 젊은 놈이

사과는 커녕 다짜고짜 욕을 하며 대들기 시작했습니다.

끝까지 인내를 하며 젊은 사람이 욕을 하면 되냐고 점잖게 타이르자 글쎄 이놈이

자해 공갈범처럼 때리지도 않았는데 시멘트바닥에 발딱 넘어지더니 머리를

쳐 박으며 "오늘 임자 만났다 올 여름 살자" 하고 큰소리치더니 바닥에 드러누워서

안 일어나는 거 있지요.

함께 있던 자기 아내가 팔을 댕기며 극구 말려도 오늘 임자 만났다면서 시멘트

바닥에 나뒹굴기를 계속 하는 겁니다.

내 주위에는 결백을 보증해줄 목적자도 없고 놈은 벌렁 누워 아프다고 나뒹굴면서

속으로 끙끙 알고 있는 나를 완전히 죽일 놈으로 모는 겁니다.

내가 자기를 한대 쳤다고 나를 폭행 혐의로 고발 했다 나요?

이건 완전히 자해 공갈범 따로 없더군요. 잠시 후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이 왱왱왱

하고 사이카를 타고 대뜸 현장에 오더니 잘잘못은 뒷전이고 그 놈의 꼬락서니만

보고 이치에도 맞지 않은 미란다 원칙을 일방 적으로 통보하는 거 있죠.

"당신을 폭행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 할 수 있으며 불리한

진술을 거부 할 수 있으며 변호사를 선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것인 줄 알았는데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황당한 기분으로 생전 처음 폭행혐의로 경찰서 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창피스럽게 조서를 쓰면서도 옥신각신 했는데 동구 클로버 아파트에 사는 모

건설업체 노동자라 뇌까리며 욕설은 처음부터 입에 붙어 다니더군요. 

평소 자기 남편의 행패를 잘 아는 아내가 사과 하여 겨우 사건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 왔지만 나로서는 영화 잘보고 똥 밟고 온 기분이었습니다.


어이없는 일을 당해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나는 열불을 안고 자성하며

하루를 보내려고 작정 했습니다.

그러나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가 오늘밤 자기 친구들하고 우리 집에서 공부

하다가 같이 자기로 했다 해서 하는 수 없이 웅촌에 있는 숯가마 찜질 방에

가서 이열치열도 할 겸 하룻밤을 따가운 눈을 비비며 지새우기로 했습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 가요.

글쎄 그놈이 이곳을 어떻게 알고 찾아 왔는지 저쪽 구석에서 지 아내와 뭔가

다투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폭력배 같이 부랴부랴 하고 험상궂게 생긴 녀석이 또 행패를 부릴까 봐 

덜컹 겁이 나기 시작 했습니다.

우선은 녀석이 안 보이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땀 빼기 작업에 몰두 하다 잠이

들었는데 글쎄 녀석이 내 등 뒤에서 목을 조는 아찔한 악몽을 꾼 겁니다.

자꾸만 눈앞에 그놈의 악한 얼굴이 보이기 시작해서 한 여름 뜨거운 숯가마

속에 들어가서 참선을 연습 하는 것도 괜찮았는데 기분이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곤히 잠든 아내는 행복 해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불안해서 그놈을 확인하러 가까이 갔을 때 주변 사람 하는 말이

아내와 다투다 제 성질에 못 이겨서 한 시간 전에 짐 싸들고 나갔다는 겁니다.

일단 놈의 위협에서 벗어나 겨우 잠을 청해 날밤을 면했지만 이제부터는

나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었습니다.  

 


악몽 같은 밤을 보내고 난 다음 날, 무주에 사는 와친녀(와이프 친구 여자)가 덕유산

골짜기가 너무 좋다고 통사정을 하듯이 오라고 전화가 와서 애라 머리도 식힐 겸

별 준비 없이 10년 전에 사 놓은 코롱텐트 하나 싣고 집을 나섰습니다.

가는 곳이 용추계곡이라는 곳인데 숲이 하늘을 덮고, 옆에는 폭포가 떨어지고

인적이라고는 어디에도 없는데다가 도로는 비포장 도로 여서 자동차 밑창이 닿을

때 마다 애지중지 하던 차라 가슴까지 아파왔습니다.

물소리와 매미 소리에 전화도 안 터지는 골짜기를 쉬엄쉬엄 달리는데 뒤쪽에서

구식 코란도 차가 먼지를 일으키며 급히 달려와서는 길을 비켜 달라는 듯 깜빡이

신호와 크략선을 동시에 울리기 시작 하더군요.

급한 일인가 싶어서 옆으로 비껴 주었는데 포악하게 달리며 지나가는 얼굴.

뿌연 먼지사이로 얼핏 보았는데 분명히 자해 공갈범 그놈의 얼굴이었습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인지 아니면 운명의 장난인지 이곳까지 그놈이 따라 왔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어 몇 번이고 고개를 갸우뚱 했지만 엄연한 현실이었습니다.

울컥 겁이 났지만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한 나는 사나이답게 뒤를 따랐습니다.

목적지에 올 때까지 그놈의 차가 보이지 않아 내심 걱정이 되었습니다.

몇 년 만에 만난 아내와 와친녀는 한량없이 반가움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네댓 채가 살고 있는 산골 마을의 어둠은 빨리 찾아 왔고 저녁을 먹은 일행은

달빛 비치는 골짜기로 산책을 나갔지요.

산수화 같은 골짜기에 폭포수 소리인지 귀신 소리인지 산짐승 소리인지

무시무시한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한적한 개울가에 자리를 펴고 앉았습니다.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많던지 그녀들의 대화는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듯 끝없이

이어지고 외로운 나는 혼자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500여 미터를 남겨 놓은 지점에서 누군가가 내 뒤를 밟는 낌새를 느꼈습니다.

사방은 달빛 때문에 훤했지만 약간 어두침침해서 가시거리가 짧아 뒤를 돌아봐도

아무도 안 보였지만 나는 분명히 그놈일 거리고 직감을 했습니다.

놈은 그날부터 줄곧 나를 미행하기 시작했다는 예감이 들자 아찔했습니다.

뒤 따라 오는 발자국 소리가 더 분명히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고개를 돌리면 놈이 극한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계속 앞으로

걸었습니다. 500여 미터의 거리가 한없이 멀게 느껴지고, 풀잎 부딪히는 소리에

묻힌 놈의 발자국 소리가 더 가까워 오자 오싹 머리카락이 서기 시작하면서

두 다리의 힘은 점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뒤에서 흉기로 찔러도 될 만큼 거리가 좁혀 졌고 어쩌면 뒤에서 가해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죽음이라는 아주 짧은 찰라가 스쳐 갔습니다.

내가 개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너무 억울하고 분한 거 있지요.

내 아내와 자식의 얼굴 등 10여 가지의 생각이 아주 짧은 순간에 뇌리를 스쳐

갔는데 결론은 내가 어떻게 하던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살겠다는 집념으로 20여 미터를 걸음아 나 살려 라고 뛰었지요.

대문을 붙잡고 큰소리로 외쳤지만 말도 나오지 않고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는데

어떤 여자가 혼비백산 하여 남편을 부르는 괴성소리에 정신을 차렸나 봅니다.

곧바로 20여 미터쯤 떨어진 건너 집에서 사람 소리가 났고, 그 집의 막내아들

이라는 사람이 나를 일으켜 세웠는데 글쎄 바로 그 놈, 나를 죽이려 했던

자해 공갈범이었습니다.

그 놈도 나를 알아보자 부축했던 내 팔을 놓으면서 마치 똥이라도 밟은 표정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 거 있죠.

괴성을 질렀던 젊은 여자가 자초지정을 설명하기 시작 했습니다.

“제가 개울가에서 멱을 감고 오는데 앞서 가던 이 아저씨가 글쎄 저기서부터

갑자기 뛰더니 푹하고 넘어 지더라 구요. 처음엔 장난으로 그러는 줄 알았는데

가까이 와보니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별에게 물어 볼 수도 없고 저기 달보고 물어 볼 수도 없는 나는 그저 멍하니

산 그림자 만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