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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쫄병 수첩’을 마치고

在綠 2021. 2. 7. 09:02

 

 

 

내게 익숙해져 있는 것을 자극하면 감정시스템은 반사적으로 거부반응 한다. 마치 물이 저항을 받으면 분노의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이치와 같다. 울산문인협회에서 주최한 제25회 가을밤 문학축제 소설 연극 쫄병 수첩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가 그랬다. 내 평온을 건드린 이 역린 같은 것을 어찌해야 하나. 그렇다고 출연 제의를 무턱대고 거절 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봉착했다.

작년도 수필 극에 출연한 경험이 있어 나를 선임한 했다 했지만 겁이 났다. 가보지 않는 길은 설레임과 더불어 두려움이 따르는 법이 아닌가. 이참에 익숙한 것에서 탈피해 보는 일도 좋겠다 싶어서 첫 미팅에 참석을 했다.

감독이 배역을 정하면서 미리 예정해 둔 일처럼 나를 주인공으로 지명했다. 난처했고, 하필 나냐고 반문하면서 거부반응이 일어났다. 나약한 모습을 보이며 망설였지만 어찌할 수 없이 참가했다. 그렇게 10월의 마지막 밤에 공연이 잡히고 본격적인 연극 연습이 문협 사무실에서 매주 3회에 걸쳐 실시되었다.

 

1975년도 군대 내무반을 배경으로 공연되는 이 연극은 김물용이라는 신출귀몰한 가짜 도사의 행적을 연기하는 코믹한 단막극이다. 남성 전용물인 군대생활을 여성 배우가 연기함으로써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는 특이점이 있다. 작고한 소설가 김수용 선생의 소설을 각색한 이 연극은 흑백 추억이 담겨있다. 특히 경상도 사투리와 군대용어가 많아 대사 연기가 난해하다.

줄거리를 이해하면서 1012일부터 연습에 돌입했다. 밤늦게까지 연습하는 배우들의 열의가 동기부여를 했다. 진지한 자세가 분위기 상승에 기여를 했다. 집에서 여러 번 암기와 연기를 연습했지만 쉽지 않았다. 혀가 꼬이고 발음에 장애가 와서 발성이 부정확했다. 대사도 입에 붙어 물 흐르듯 되지 않았다.

3일차부터는 대본을 보지 않고 연습을 했다. 연기는 언어표현도 중요하지만 몸 언어도 동시에 해야 하기 때문에 매끄럽지 못하게 진행되었다. 문제는 코믹한 군대 내무반 생활상과 가짜도사의 표정 연기를 하는데 애를 먹었다. 관중들에게 줄 메시지가 약해 보여 어떻게 연기할 것인지 고민되기 시작했다. 단순히 김물용이라는 괴짜의 코믹한 내용만으로는 뭔가 가볍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원래 극본을 변경하는 데는 거부가 있어 그대로 연기를 종용 했다.

주인공인 나는 대사는 짧았지만 연기가 많아 소화 하는데 애로가 많았다. 연극은 전체가 호흡과 연결이 되도록 연기를 해야 했기에 서로 호흡을 맞추었다. 내용이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름대로 연기를 고안해 연습을 통해 조절해 나갔다. 특히 방백부분에서 사전에 녹음해 놓고 그에 어울리는 연기를 해야 하는데서 곤욕을 겪었다. 언어와 연기력을 적절하게 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40년 만에 입어 본 군복이 어색하고 생경하게 여겨졌다. 추억 속으로 돌아가는 군복을 다행히 작은 아들이 보관 중이어서 쉽게 해결했다. 하얗게 변한 흰머리에 모자를 쓴 모습이 영 어울리지 않아 고민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모자를 쓰니 훨씬 어울렸다. 나름대로 준비를 하면서 연기를 발굴했다.

연극은 사전적 의미로 배우가 무대에서 대본에 따라 동작과 대사를 통하여 표현하는 예술이 아닌가. 연습을 하면서도 내내 인생이란 무대에서 현재라는 대본에 따라 연기를 하는 생각으로 임했다. 비록 내가 행복해도 대본이 슬프면 슬프게, 웃는 대본에는 웃으며 연기를 하는 게 내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나는 인생이라는 생방송에서 연기 중이지 않는가. 그저 내키는 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게 인생이다. 그래서 진실 되게 연기하려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록 내 인생이지만 대본은 내가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다. 이번에는 내가 아닌 대본 속의 인물을 연기해야하기 때문에 어렵고 신경이 많이 쓰였다.

10월의 마지막 날, 12명이 하나가 되어 연극은 시작되었다. 연습을 바탕으로 실전에 강한 자신감이 일어났다. 연습한 대로 순조롭게 연극이 진행 되었고 생각한 것 보다 더 좋은 호응을 받았다. 연극이 성공리에 끝났다는 안도 감 때문인지 강한 자긍심이 생겼다. 표현은 하지 않지만 단원들의 표정은 감격을 하고 있었다.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애써 참는 단원도 눈에 띄었다. 하나가 되어 밤늦도록 연습을 했는데 왜 그러하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30분의 연극은 순조롭게 끝을 맺었다. 10월의 마지막 밤을 그렇게 생경하게 보냈다.

 

연극은 하나의 스토리가 이어지지 않고 6개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김물용이라는 가짜 도사의 스토리가 전개 되었다. 그 당시의 군대생활 장면들을 흑백 필름의 사진처럼 리얼하게 연기했다. 그때 그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인 군대생활의 귀한 순간들을 진지하게 연기했다. 비록 가짜도사의 단편적인 스토리지만 군대생활의 순수했던 열정을 그대로 들여다보게 했다. 관객들이 잠시나마 그 때로 돌아가 추억을 상기하기를 기대했다. 연극 쫄병 전선은 가슴 속에 여운으로 남기고 그렇게 막을 내렸다.

나는 지금까지 오랜 세월 연기를 하면서 살아 왔다. 이 번 연극처럼 주인공이 되어 주어진 수많은 배역을 소화시켜 온 것이다. 때로는 삶이 반복적이고 타성에 젖어버려 긴장감과 생각도 없이 연기를 할 때도 많았으리라. 인생은 연출되지 않은 연극이 아닌가. 인생을 연극으로 연기했으니 감동이 일었다.

나는 아직 인생 연기자로는 미숙한 점이 많다는 점을 인정한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도는 배역을 하며 매너리즘에 빠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생의 오후인데 진지한 준비도 없이 인생무대에 올라 연기를 하고 있으니 답답하다. 지금은 한량이로 즉흥연기를 할 때는 지났지 않는가. 오늘은 어제 대본보다 더 나은 연기를 해야 될 때다. 박수는 연기에 몰입해 최선을 다할 때서야 받는다. 그저 무대에 올라 비루한 연기로 실망을 주고 있지 않는지, 가려진 인생의 진면모를 못 보는지 뒤돌아본다. 이왕이면 인생을 멋지게 연기해야 되지 않는가. 인생연극이 끝날 때는 우레 같은 박수를 받고 퇴장해야 되지 않는가. 열정으로 열연을 해 최고의 찬사인 기립박수를 받으며 무대를 떠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