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되고 상을 받다

2020년 제39회 달구벌백일장 입상 '모탕'

在綠 2021. 2. 7. 09:29

 

 

디딤돌처럼 납작 엎드렸다. 세상 고통을 받아 줄 듯 가슴을 활짝 열었다. 아비가 며칠 집을 비운 터라 녀석은 추운겨울 군불을 때려고 장작을 팼다. 장작을 패는 어린 녀석이 힘껏 내리친 도끼날에 팍 찍혀 살점이 떨어져갔다. 극심한 고통에 몸을 떨었지만 어디에 대고 하소연 할 곳도 없다. 나무가 잘 갈라지지 않자 녀석은 도끼로 서너 번 내리찍었다. 숙련된 아비는 가볍게 자루를 잡고 중력을 이용해 내려치는데 이 녀석은 초보다. 팔에 힘을 빼고 쳐야 도끼날에 가속도가 붙는데 힘만 믿고 덤볐다. 두어 번은 나무토막의 혈을 찍었지만 부스러기를 만들며 상처만 나게 했다. 도끼에 빗맞은 나무토막이 튀어 올랐다가 땅에 처박혔다. 나는 속으로 고소하다고 녀석을 놀렸다. 혹여나 믿는 도끼에 발등이라도 찍힐까봐 조마조마 했다.

나는 녀석의 도끼질 충격 세기를 이미 알고 있는 터라 눈을 감아 주었다. 그래도 어린 녀석이 장작을 패는 용기가 갸륵해 도끼날을 모두 받아 주었다. 산에서 나무를 베서 지게로 지고와 톱으로 잘라 장작을 패는 녀석이 아닌가. 녀석이 장작을 패기는 단련이었다. 나무가 속살을 보이며 쪼개지면 쾌감을 느꼈다. 도끼질이 서툴러도 뭐든지 할 수 있겠다는 자심감이 생겼다.

어긋난 도끼날에 가운데가 융숭 파여 모습이 흉측한 몰골이다. 내가 밭치지 않았다면 도끼날은 상하고 무뎌졌을 것이다. 죄 없는 그 사람을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찍히는 도끼날을 받아 주는 것이 내 운명인 것을.

 

나는 도끼날에 몸이 망가져도 결코 녀석을 원망하지 않았다. 응당히 내가 감수해야 할 일인데 흉측하게 살점이 피였으면 어떤가. 아궁이 안에서 타서 없어지는 땔감이 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생이란 때로는 원치 않은 곳으로 흐를 때도 있지 않는가. 내가 나무들이 무성한 산에서 가난한 녀석의 집 장작이 되기 위해 이곳까지 올 줄이야 꿈속에서라도 생각을 했겠는가. 그래도 녀석을 위해 군불을 피워 따뜻하게 해준다 생각하니 보람까지 생겼다.

녀석은 바닥에 깔린 내 등에 장작을 올려놓고 패기 위해 도끼질을 했다. 내가 만신창이처럼 망가져도 녀석은 안쓰러워하거나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내가 요긴하게 쓰이나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대접은커녕 고마워하지도 않았다. 그런 차별에도 골 내지 않았다. 도끼날에 맞아 동강나는 날에는 곧바로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 땔감이 되고 말 것이다. 녀석은 만만하거나 익숙한 것에는 관심이 없는 습성이 있었다.

 

나는 도끼날을 보호하고 일이 잘되도록 든든한 받침대 역할에 충실했다. 그것이 나의 소소한 행복이라 생각했다. 도끼날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서 체념할 명분도 없다. 즐기며 하는 일이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등을 내밀어 도끼날을 받아들였다. 세상사는 일은 말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는 법이다. 이용도 당하고 대접을 받아 호강도 하는 법이다. 나는 좋던 싫던 도끼날을 맞으며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 굴레를 벗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죽을 만큼 고통을 당해도 지그시 눈을 질금 감고 모른 척 넘어가야 한다. 까닭도 없이 살점이 뜯기는 도끼날 세례를 받아도 넘어가야 한다. 피할 수 없는 도끼날에 순순히 몸을 내놓아야 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시도 않지 않는가. 그렇게 될 줄 알았으면 자신을 불태워 재가 되는 장작의 길을 택했을 것이다. 고통의 길인 줄 미리 알았다면 누가 그 길을 따라 갔겠는가. 삶에 있어 잔잔한 기쁨을 느끼고, 고통을 물릴 줄 안다면 행복의 소유자가 아닌가.

 

나도 한 때는 비옥한 산에서 곧게 자란 나무가 부러웠다. 대궐 같은 집이나 전각의 기둥이 되어 특채로 뽑혀 가는 나무가 되지 못한 것을 원망했다. 척박한 바위틈에서 몇 번이고 삶을 포기할 뻔하며 비뚜름하게 자란 나는 가난한집 장작도 되지 못했다. 아무리 차별하지 않고 평등한 세상이지만 지연과 학연을 무시하지 못했다. 개천에 용 나듯 출세하고 싶었지만 능력의 한계로 운명에 끌려 다녀야만 했다. 운명에 순응하지 않았으면 나는 진작 세상에서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육성과정이 부실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는지 모른다.

그런 내가 운 좋게도 어린 녀석에게 간택이 되었을 때 천운이라 생각했다. 이왕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죽을 때까지 녀석을 위해 한 몸 바치기로 했다. 내가 간택된 것은 생김새가 구불구불하고 못생긴 밑동을 지녔기 때문이다. 맷집도 있고, 나무토막이 흔들림도 적어 도끼날 충격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도끼질은 참나무처럼 결이 선명해야 잘 갈라지고 내가 받는 충격도 적는 법. 나뭇결이 구불구불한 것이 장작으로는 부적격하다. 특히 옹이가 져 곡진 삶을 살아온 나무는 도끼질에도 잘 갈라지지 않아 장작으로서 자격 미달이다. 이런 종류의 나무는 충격이 심하고 내가 견디기 쉽지 않아 죽을 맛이 된다.

 

요즘 세상에는 날이 시퍼런 도끼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도끼를 잡으면 권력이 생기고 권세를 누리려는 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도끼라는 권력을 잡으면 없던 힘도 생긴다.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도끼질을 해 찍어 내버린다. 그러니 나처럼 있는 듯 없는 듯 드러내지 않고 납작 몸을 낮추어 묵묵히 소임을 다하는 사람이 드물다. 나처럼 도끼에 맞으면서도 날을 보호하는 자기희생을 하는 사람이 흔하지 않다.

세상의 많은 어버이도 그렇지만 특히 녀석의 어버이의 희생은 남달랐다.

장애를 가진 자식의 도끼날이 20여 년간 찍어 내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자귓밥과 지저깨비에 숨통이 막혀도 묵묵히 그 자리에서 희생한 어버이였다. 온 몸이 닳고 닳아 만신창이가 되어도 그 자체만으로 그만인 녀석의 어버이. 가진 것 다 내 주고도 늘 부족해하시는 어버이가 나를 꼭 닮았다. 빗금으로 난 상처가 어버이의 모습이라면 지나친 표현인가. 세상에는 나와 같은 역할을 하는 어버이와 선생이 있어서 세상을 살아가는 보람이 있는지도 모른다. 도끼날에 가슴이 움푹 파여도 표시내지 않는 어버이. 자식이라는 도끼날을 온 몸으로 맞으면서도 보호하고 늘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켜낸 어버이셨다

자식은 어버이가 뒷바라지에 희생했어도 대개는 그 은혜를 잊고 산다. 자식에게 문제만 생기면 모든 원망을 감수해야 하는 어버이. 육남매의 거센 도끼질을 받아내느라 등까지 굽고 다리에 힘줄이 생긴 하지정맥류 증상도 자신의 탓으로 돌린 분이 녀석의 어머니셨다. 어버이가 힘든 것을 아는 아들은 드물고, 설사 안다고 말해도 그저 믿기 어려운 빈말로 들린다. 녀석이 그런 축에 들어간다. 짐작컨대 녀석이 부모가 되어 봐야 그 은혜를 알 것이다.

 

장작더미가 높아 갈수록 녀석은 지치고 나도 지루해졌다. 장작가리가 가지런히 쌓여 가면 도끼질하는 녀석의 숨소리마저 잦아 든다. 도끼날에 갈라진 장작이 뒤란 한구석에서 화끈하게 군불을 피울 태세로 있다.

세상에 소멸되지 않는 것은 없다. 나도 언제부터인지 가스나 석유에 밀려나 켜켜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하찮아 보이는 나무토막이었던 내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임무를 마치고 퇴역을 했다. 그 옛날 목수들이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내 위에 연장을 올려놓고 고사를 지냈던 신화를 남기고 사라져 갔다. 특별히 모질게 살아가는 놈이라야 간택 되었던 나의 삶을 닮은 사람들이 많기를 기원한다.

후미진 곳에서 남모르게 희생을 하는 모탕 같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