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되고 상을 받다

2020년 제9회 대한민국 독도 문예대전 특별상 '톳여(礖)'

在綠 2021. 2. 7. 09:31

 

그를 바라본다. 보고 또 봐도 한 폭 수묵화다. 울릉도 바다에서 만난 신령한 물상이다. 유상곡수(流觴曲水) 풍류를 즐기며 마신 술잔을 엎어 놓은 형상인 그가 윤슬을 반짝이며 나를 유혹한다. 파도가 기괴하게 소용돌이치며 급하게 빨려드는 검푸른 동해바다.

일렁이는 파도의 흰 포말에 덮여 보일 듯 말듯 한 그를 바라본다.

넘실대는 파도를 가뿐히 물리고 설핏 모습을 드러내는 그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가 일편단심으로 애타게 연모한 사람이 누군지 알지 못한다.

파랑이 촉수로 그의 입술을 핥으며 에로티시즘을 한다. 태양의 질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파랑의 구애는 계속된다. 정성을 쏟는 파랑의 집념에도 그는 끝내 몸을 내주지 않는다.

건들마 줄금에도, 강쇠바람 뭉치에도 쉬이 휘둘리지 않고 묵묵히 버티는 그를 보면 신령한 경배가 인다. 날선 형상화로 은유를 풀어내 그를 닮은 내 아버지를 떠올렸다.

 

2,500만 년 전 신생대 화산분화로 동해에 우뚝 솟은 환상의 섬 울릉도 바다에 그가 있다.

바다 수면에 드러난 바위 윗부분이 그의 이름이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톳여라 부른다. 톳여는 질량감이 있는 함축어다. 어느 시인이 쓴 시에 톳여란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사동항구를 지나 통구미 마을 앞 바다에서 파도를 물리는 그와 운명처럼 만났다.

수정같이 맑은 바다에 듬성듬성 있는 무리 중에 유별나게 거무스름한 그가 내 눈에 잡혔다.

심연의 바다에 몸을 숨긴 그가 햇살에 반짝이는 은빛물결을 머금고 내게로 다가왔다.

수면 아래에 숨은 그의 몸은 따개비, 홍합, 굴을 키워내는 자궁이요 둥지다.

시멘트물질 따개비가 그의 몸에 부착해 산다. 홍합이 나일론실 족사(足絲)로 껌 딱지처럼 달라붙어 있어도 거세하지 않는다. 터줏대감 굴도 갑옷을 입고 그의 몸에 붙어 산다.

몸에 붙어 사는 생명체를 키워내기 위해 그는 살신성인으로 기구한 삶을 살아오고 있다.

그는 날뛰는 파도가 밀려오면 잠수해 버린다. 산산이 부셔져 부딪쳐도 꼼짝하지 않는다.

그는 결코 뭇 생명체에 뽐내거나 군림하지 않는다. 파도에 순응하고 모두를 내려놓는다.

파도가 일면 항거하지 않고 자신을 내준다. 파도가 밀려가면 당당하게 제 모습을 드러낸다. 사라지는 날까지 승천을 꿈꾸며 오체투지로 하늘에 기도하는 모습이 경배하다.

은빛 요패처럼 햇살에 반짝이며 그가 관심을 끌게 한다. 그 위용에서 에너지가 느껴진다.

끌어당기면 다가올 법한 그는 작은 섬으로 보여 진다. 울릉도 앞바다에서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는 외로운 섬이다. 그가 동해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어 그 섬을 수호하고 있다.

 

올 봄, 예고 없이 외로운 섬 울릉도와 독도를 찾았다. 섬이 자석처럼 유혹했기 때문이다.

네 번째 다시 찾은 울릉도는 내게 화려한 기억과 스토리텔링이 남아 있는 섬이다.

내 고향 후포항구에서 코속정을 타고 울릉도 사동항구까지 두 시간 넘게 달렸다.

섬에 이르자 파도에 일렁이는 선창 너머로 울릉도 신비한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검푸른 파도와 환상의 섬이 저마다 수려한 만연체 수필로 내 눈을 소용돌이치며 후벼 팠다.

바다에 빛나는 황홀한 윤슬이 넋을 앗아갔다. 신의 DNA가 내게 행복감을 듬뿍 안겨준다.

성인봉과 불끈불끈한 봉우리들의 능선이 가파르게 내려와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

심해의 기가 산 능선을 타고 올라와 불후의 명작 푸른 빛 울릉도를 만들어 놓았다.

가파른 절벽을 이룬 해변이 아름다운 단애를 드러내며 군병처럼 거수경례를 했다.

성벽처럼 솟은 화산섬 울릉도가 그림 동화를 읽어주기 시작했다. 환상의 주상절리 기암괴석과 연초록 옷을 입은 울릉도 풍광이 팔랑팔랑 스쳐가며 감흥을 일으켰다.

독도박물관은 나를 앉혀놓고 울릉도 특유의 화산지형에 얽힌 신비한 전설을 들려주었다.

2012년 독도와 더불어 1호 국가지질공원으로 인증되기까지 울릉도 역사다큐를 역설했다.

초대형 천연색 화면에 울릉도의 과거와 현재를 생중계하기 시작했다. 역사서에 보이지 않는 신화와 전설까지 실려 동해와 울릉도에 대한 무량한 지식을 얻게 했다.

독도박물관은 일본의 불법적 독도 침탈 역사와 끈질긴 침략 근성을 환기시켜 주었다.

 

차를 몰아 울릉도 일주 투어에 나섰다. 저마다 축가를 부르기 위해 목청을 가다듬는다.

외로운 섬에 울러 퍼질 불휴의 명곡, 대자연 촌철살인에 저절로 엉덩이를 덩실거린다.

신호등이 있는 통구미터널을 지나 벼랑길 해안도로 밑 바다와 기암괴석 비경이 춤을 춘다.

검푸른 동해바다가 추는 춤사위에 울릉도가 일렁이며 뭇 생명체를 춤추게 한다. 먼 먼 심해에서 밀려온 물줄기는 평균깊이 1.36km 해중협곡을 넘어 오느라 지쳤지만 묵직하다.

남양항 마을 비파산 아래에 있는 수려한 주상절리 국수바위도 인상적인 소고춤을 춘다.

기암괴석은 거센 파도에 시련이 올법한데도 하얀 포말로 달래서 돌려보내 경외심이 인다. 외압에 쉬이 흔들리지 않은 주상절리는 애초에 신이 빚은 그대로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사자바위가 그림자를 깔고 징을 친다. 영혼이 선호하는 금빛 낙조가 가야금 산조를 한다.

해안을 휘감고 돌아가는 산책로에는 부서지는 파도와 갈매기가 발아래에서 장구를 친다.

1940년대에 건축해 울릉도 개척 당시를 보여주는 너와 투막집이 홀로아리랑을 부른다.

복고 감성이 너와를 두드린다. 사라져 가는 것이 이끌리어 향수가 실루엣으로 다가온다.

현포항구를 지나면 코를 물에 담근 코끼리 바위가 남도민요 육자배기를 부른다. 도도하게 코를 담그고 해양심층수를 당기고 가스 하이드레이트를 지키고 있다.

전망대서 바라본 산중평원 장관을 보고 명이나물 밭을 거닐며 울릉도 트위스트를 부른다.

눈길 주는 곳마다 풍경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시가 되고 수필이 되어 감성을 자극한다.

울릉도 최고의 경관인 삼선암과 관음도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세운다. 화산활동으로 바닷물에 깎여 떨어져 나간 관음도. 그 섬 주상절리에 앉은 갈매기들이 독도는 우리 땅을 부른다. 울릉도에 반해 놀다 옥황상제 노여움을 사 바위가 된 세 선녀 삼선암의 진양조가 들린다.

신비한 전설과 역사를 엮어 길이 2.6호방한 행남해안산책로를 냈다. 벼랑을 깎아 낸 산책로에서 만난 더없이 맑은 공기와 바다, 천연색 비경이 울릉도의 속살을 보여준다.

해안에서 화산 생성물 베개용암, 타포니, 재퇴적쇄설암이 있는 야외 지질 박물관을 만난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갈매기가 다가와 청아한 울릉도 타령 한 곡조를 불러준다.

오랜 세월 파도에 벼랑이 침식돼 만들어진 해식동굴 축가로 축제는 대미를 장식했다.

섬을 아우르는 둘레길이 인생처럼 돌고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찬란한 낙조가 쏟아지는 울릉도 음악회는 득음이 되어 내안의 모든 잡념을 삼켜 버렸다.

동해바다 가운데에 우뚝 솟은 울릉도. 천혜 자연이 부른 협연이야 말로 최고 음악회였다.

 

첫 눈에 띈 그가 3년 전 딱 3일을 앓으시다 88세로 소천하신 아버지를 소환했다.

아버지는 평생 가난과 고생에 찌든 삶을 이승에 죄다 내려놓고 빈손으로 소천 하셨다.

아버지라는 거친 바다에 그물을 쳐두고 힘겨운 노를 저으며 한 평생을 살다 가신 분이셨다. 폭풍이 불고 해일도 불어와 덮쳐도 그가 했던 것처럼 당당하게 파도를 부리며 버텼다.

일편담심으로 6남매를 키워낸 아버지의 정성과 희생은 숭고했다. 두 명의 자식을 잃은 슬픔을 삭인 아버지는 안으로만 눈물을 흘렸다. 제 안에 있는 것들을 보듬어 키우는 섬이었다.

따개비가 파도에 떨어지지 않게 지켜 주는 톳여 같은 섬이었다. 홍합, , 바다가재를 보호하는 섬이었다. 아버지는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마음의 칼을 갈았다.

부딪히는 파도에 순응하며 견고하게 아버지 섬을 수호 했다. 장한 아버지는 동해를 지키는 문무대왕릉처럼 내 가슴에 굳건한 바위 호석을 세워 주고 떠나셨다. 늘 가까이에서 내가 올곧게 살아가도록 지켜보고 계실지 모른다.

눈을 감고 아버지를 불러 본다. 아버지의 환청이 들려온다. 그리움이 가슴을 파고 든다. DNA를 이어 받은 내가 아버지 기척 없이도 험한 세상을 견뎌내는 톳여가 되었다.

 

유년시절, 나는 귀에 물이 들어가 뇌막염이 발병하여 3개월간 병원생활을 했다.

병증세가 위중해 일어 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자 아버지는 동네 노파를 불러 굿을 하고 객귀도 물렸다. 위약효과 덕분인지 내게 잠시지만 평온이 찾아왔다.

내놓으라는 병원에서 치료가 어렵다고 외면하는 바람에 모두를 체념하고 죽음을 결심했다. 마음을 비운 탓인지 아픔도 사라지고 참으로 마음이 편안했다. 행동을 멈추고, 표현이 멈추고, 생명을 멈추는 죽음이기에 만사가 편안했다. 죽음이 보이고 한 줌 재처럼 가벼웠다.

내 목숨은 완강했다. 범접할 수 없는 순간 속에서 생명의 질량감이 신을 부르고 있었다.

수술직전 정신이 들어 의사의 미소를 보았다. 그 미소가 신의 DNA가 되어 나를 살려냈다.

수술 후 3개월이 지나도 수술 부위 염증이 쉬이 완치되지 않았다. 매일 아픈 주사를 이겨내느라 어린 내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치료비가 없어 아픈 몸으로 퇴원했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의사가 되어 치료했다. 고름이 멈추지 않아 입으로 고름을 뽑아냈다.

너무 고통스러워 아버지와 내가 함께 우는 날도 여러 날 있었다. 고통과 희생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눈물겨운 고행이었다. 심하게 아플 때 나는 신을 원망했다. 작은 뼈 조각이 상처에 남아있어 그렇게 고생을 시켰던 것이다.

아버지의 눈물은 가슴속으로 까맣게 타고 들어가 먹감나무 무늬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 어린 빗물이 아버지 심장을 뚫고 들어가 더 선명한 수묵화를 만든 것이다.

아버님이시기 전에 신이셨다. 아버지는 누굴 원망하거니 지청구를 하지 않았다.

몰래 쏟아 냈던 눈물과 고통을 자신 탓으로 돌리셨던 성현 같은 아버지셨다.

그 아버지 삶을 닮은 톳여를 울릉도 바다 위에서 만났으니 감개무량했다.

 

울릉도 바다 수면 위 있는 아버지를 닮은 톳여. 내게 주고 가신 애정이 그리움 된다.

아버지 사랑은 굽은 등에 있어 드러나지 않아 그때는 아버지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

넓은 바다 수면위에 몸을 감추고 살짝 모습을 보이는 톳여. 모진 파도를 당당하게 물리치는 톳여처럼 아버지 삶도 그랬다. 이제야 굴곡진 아버지 섬을 거두어 천상에 보내드렸다.

아버지 음성이 파도의 후음처럼 귀를 두드린다. 아버지 등에 업혀 맡은 그윽한 땀 내음.

입으로 고름을 빨아도 싫은 표정 없었던 얼굴. 국립공고에 합격해 감격스러워 웃던 모습. 대기업 취업과 대학졸업. 회사에서 부장까지 승진 할 때마다 기뻐하시던 화사한 미소. 대청마루에서 맨발로 뛰어와 안아주신 코끝이 시큰한 기억들이 실타래처럼 풀려 나온다.

내 안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 아버지 기억이 아슴아슴 떠오른다. 일주를 마친 나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불효를 톳여에 내려놓았다. 천상에서 아버지가 환하게 웃고 계실 것 같다.

내 마음에 행복을 그렸다. 아름다운 울릉도와 톳여에서 진정한 행복을 얻었다.

파도가 온 몸을 강타해도 당당한 그 톳여처럼 뚜벅뚜벅 내 길을 걸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