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산행기

태기산 눈 산행의 매력

在綠 2026. 1. 17. 13:59

 

새해 111일 새벽, 영하권인 한파를 뚫고 붉은 말을 타고 달려 강원도 횡성 태기산(1,261m)으로 향한다.

북쪽으로 갈수록 눈을 인 산봉우리가 마음을 설레게 한다.

새해 들어 처음 보는 눈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태기산은 신라 박혁거세에 의해 멸망한 진한의 태기왕(泰岐王)이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항전하던 곳,

그러니까 태기왕이 삼랑진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패하여 덕고산에 쫓겨 내려와 4년 동안 군사를 기르면서 재기를 준비하다 결국 신라 박혁거세에게 들켜 부하들과 함께 죽음에 이르렀다는 설화가 전해져 온다.

덕고산(德高山)이 태기산으로 바뀐 설화다.

 

태기산은 횡성 청일면과 둔내면을 비롯해 평창 봉평면과 홍천 서석면까지 세 개 지역에 걸쳐 솟은 산이어서 클 태() 터 기() 기운 기()로 표기하지 않았나 싶다.

 

 

5시간을 달려 도착한 해발 980m 평창군 봉평면 양구두미(兩邱頭尾) 재에는 강원도의 특성답게 센 바람이 불고 눈이 제법 쌓여 있었다.

 

좁은 주차장에는 제설이 잘 되어 있는 임도는 차량 출입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많은 인파로 붐볐다.

차량이 다닐 정도로 넓고 비교적 완만한 임도를 따라 올라간다.

간간이 썰매를 타고 내려오기도 하고 짐을 싣고 오는 등산객도 눈에 띈다.

 

더러는 부모님을 대동하고 온 중년의 아들은 손을 잡고 걸어가는 부자의 광경에 코끝이 찡하다.

불효인 내 가슴속이 아려진다.

 

 

위로 올라갈수록 살을 에는 추위가 무단으로 장악하고 있는 이곳은 차가운 바람의 우범지대이다.

눈이 날려 앞을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몰아치는 센 바람이 상당하다.

 

2008년에 설치한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면서 내는 소음이 위협적이다.

태기산 풍력발전기는 높이 78m, 날개 지름 80m, 20MW급 발전기가 20기나 있어 평창군 지역 25,000가구에 정력을 공급하는 등 산림을 대체할 만큼 효과를 낸다고 했다.

 

 

점점 쌓인 눈이 많아지고 풍경이 유장해지기 시작한다.

나무는 햇살에 반짝이는 눈꽃과 흑백이 대비를 이룬 수묵화와 수채화다.

 

눈이 쌓인 나뭇가지에 바람이 지나간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바람의 영역을 표기해 둔 듯이 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신의 솜씨로 조각해 놓은 눈으로 만든 작품은 걸작, 그야말로 빼어난 예술의 조각품이다.

여기에 장식품으로 만들어 놓은 상고대가 황홀하다.

 

서서히 쌓인 눈의 양이 많아지면서 아이젠을 찬 탓에 발걸음도 조금씩 느려진다. 밟히는 소리와 호흡음이 겹치면서 커지고, 바람 소리까지 합쳐져서 소음으로 변한다.

 

 

산봉우리엔 KBS 원주방송국의 송신소와 보안 시설이 있어 정상 송신소 주변 지역은 폐쇄되어 있었다.

설경은 황홀경에 빠질 정도로 아름답지만 바람이 훼방을 놓아 그 감흥을 누리지 못하고 앞을 보고 걷기만 한다.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렸던 장소인지 산 전체가 눈썰매장으로 된 우아한 풍경이 압도적이다.

 

 

이제 평창 땅 무이 쉼터에서 횡성으로 넘어가는데 '태기산 국가 생태탐방로로 접어든다.

하늘을 찌르듯이 우뚝 솟은 풍력발전기의 소름 끼치는 소리 때문에 정신없이 걷다 보니 옛 봉덕초등학교 태기분교 터까지 왔다.

 

 

1,200m 고지에는 1960년과 1970년대에 화전민이 살았던 땅이다.

1968년대 정부의 '화전 정리법'에 따라 강원도 내에 흩어져 살던 화전민을 태기산 고원지대로 강제 이주시켰다. 120여 가구 화전민들은 산을 깎고 초목을 태워 계단식 밭을 만들고 움막에서 생활했다.

 

벌목과 개간 일을 하는 화전민에게 정부는 밀가루를 제공했다.

그들은 낯섦을 두려워하지 않고 발걸음을 이곳에 옮겨 길을 만들고, 그 길은 다시 사람을 모아 마을을 만들었다.

 

 

태기분교는 1968년 개교해 8년 만인 1976년도에 폐교된 하늘 아래 첫 학교였다.

전교생 76명의 학생으로 첫 입학식을 한 분교는 한때는 150여 명의 학생이 이 학교에 재학했다.

 

그러나 정부의 화전지 개발사업 실패로 화전민 강제로 이주정책으로 이곳을 떠나면서 북적이던 발걸음은 지역의 소멸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마을은 그 생생함을 되찾고자 새로운 사연들을 만들었다.

 

 

그 화전민들이 역경을 딛고 일궈낸 애환의 터전 위에 지금은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장관을 이룬 눈꽃 산행 명소가 되었다. 이어서 국가생태탐방으로 조성되면서 눈꽃 설경과 배낭 도보 여행의 성지가 되었다.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라는 대하소설 지리산의 저자 이병주의 소설 산하에 나오는 구절이 실감 나게 한다.

 

 

길가에 태기산 풍력발전이 보인다.

포스코건설과 유러스 에너지가 각각 50%씩 지분을 나눠 갖고 있으며 일본 도쿄전력이 해외 풍력사업을 위해 설립한 투자 계열사인 유러스가 대표를 맡아 외국인 투자 법인으로 등록되어 있다.

 

 

태기분교 터를 지나자, 경사가 심하다. 그래도 뽀드득 눈 밟는 소리는 걷는 재미를 더해준다.

태기산 국가 생태탐방로로 산림자원을 활용해 친환경 관광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20164개 구간을 조성했다. 눈이 빚는 설경이 유난히 아름다워 태기산 정상은 태기백운(泰岐白雲)이라 하여 변화무쌍한 구름의 오묘한 조화가 장관을 이루는 것으로 유명하다.

 

 

북쪽으로 완만히 뻗은 태기산 자락을 따라 놓인 풍력발전기들이 하얀 눈꽃들과 어우러져 한 풍경을 만든다. 식생이 우수해 다양한 형태, 색상, 효능을 가진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대부분 습기가 많은 지역에 서식하며 잎 가장자리가 톱니 모양 식물들이 많이 자란다. 특히 '바람'이라는 의미가 담긴 식물 이름이 많다.

 

 

태기산 정상석은 태양을 등지고 있었지만, 너무 추워서 빠르게 사진을 찍었다.

오후 산바람을 피하려고 하산을 시작한다.

 

송신탑이 있는 1,216m 최고봉은 군부대로 출입이 통제된 까닭에 오를 수 없지만, 대신 풍력발전기들이 하얀 눈꽃들과 어우러져 풍경을 만든다.

 

 

길가에 세워진 유명한 횡성의 특산물인 한우 조형물이 휘몰아치는 눈살을 맞으며 올라온 나를 배웅한다.

산행 거리 9km를 따라 3시간 만에 되돌아왔다. 눈을 속이지 않는 마술이 펼쳐지는 곳.

바로 태기산의 매력적인 자연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