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연한 봄날, 세상의 모든 색을 연둣빛으로 칠해 놓은 듯했다.
울산 도심을 가로지르는 태화강국가정원과 남산 일원에서 열린 2026년 동창회장배 동문등산대회에 참가했다.
마치 봄이 보낸 초대장이 도착한 듯했다. 하여 마음은 학창 시절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오전 10시, 태화강 둔치에 마련된 행사장은 먼저 도착한 동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900여 동문은 얼굴을 더듬듯 바라보았다.
기억이 떠오른 듯 환한 미소로 서로를 확인했다.
오랜 시간 속에 남아 있는 결은 여전히 선명했다.


그리고 명찰에 적힌 이름을 보는 순간, 잊힌 줄 알았던 시간이 파도처럼 되살아났다.
강 건너편으로 눈을 들자, 위엄 있게 서 있는 태화루가 시야에 들어왔다.

신라 선덕여왕 시절 태화사의 누각으로 세워졌다는 그 건축물 태화루.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견뎌낸 듯 고요한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 아래로 펼쳐진 용금소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물빛을 품고 있었다.
명주실 한 타래를 풀어도 바닥에 닿지 않는다는 전설.
전설을 초월해 자연 앞에서 느끼는 경외심의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기수별로 마련된 부스에서는 재회의 기쁨이 피어났다.
손을 맞잡고, 때로는 말없이 웃음만으로도 충분한 인사가 오갔다.
잊고 지냈던 얼굴들, 유적처럼 쌓여 있던 시간이 되살아났다.
때로는 원을 그리며, 다시 같은 기억의 자리로 우리를 불러 모았다.

남산은 높지 않았지만, 봄이 길어 올린 푸른 기운이 산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십리대숲은 바람과 함께 깊고 은은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전날 내린 비로 불어난 태화강은 생명의 리듬을 더욱 또렷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태화강은 울주군 두서면 백운산 탑골샘에서 발원해 동해로 유입되는 길이 47.5㎞의 생명의 하천이다.

산업수도 폐수로 한때 죽음의 강이라 불렸지만, 다시 생명의 강으로 복원되었다.
연어, 은어 등 토종어종과 백로, 고니, 수달, 너구리 등 다양한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국내 최대 철새도래지로서 백로와 까마귀 떼의 군무가 장관을 이룬다.
한 해 5만 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 태화강이 우렁우렁 흐르고 있었다.
태화강전망대, 삼호 철새홍보관원 등 20여 개소에서 관광과 체험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고개를 들고 있는 왜가리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수달과 함께 국내 하천 생태계의 포식자로, 긴 목을 뻗어 부리로 찔러 사냥한다.
물닭이 모여있는 풍경은 그림 같았다.
두루미, 황새, 따오기 등 다양한 철새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물속으로 몸을 던지는 물닭의 자맥질은 생명이 교차하는 공간임을 보여 주었다.
동문 관계도 때로는 탁해지고, 때로는 흐름을 잃기도 하지만, 다시 맑아지고 다시 흘러간다.
이 자리에 모인 것도, 어쩌면 각자의 삶이라는 강이 다시 합류하는 순간일 것이다.

등산은 태화강동굴피아 옆에서 남산을 오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0회 동창생 스무 명 남짓과 함께 산길에 발을 디뎠다.
가파른 산길을 따라 오르다 잠시 멈춰 숨을 고르는 동안, 음료를 나누어 마셨다.
짧은 휴식이었지만, 그 속에는 말로 다 하지 못한 세월의 무게와 서로를 향한 이해가 스며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남산의 최고봉, 은월봉에 올랐다.
그 옛날 부족국가 때 북쪽에 있던 어느 부족국가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이름 지은 남산.
120m 전후 12개 봉우리 중 최고봉인 은월봉에서 마주한 풍경은 그림처럼 펼쳐졌다.
태화강은 곡류를 그리며 도시를 감싸 안고 있었다.

국내 제2호 국가정원인 태화강국가정원의 풍경은 그 곁에서 유장하게 펼쳐졌다.
그리고 영산홍이 붉은 꽃망울을 터뜨리며 환영했다.
남산루 누각에 올라 산 아래를 조망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풍경이었다.

은월봉이라는 이름은 산 아래에서 바라본 봉우리가 달에 가려진 듯 보인다는 뜻이다.
고려말 이색의 아버지 이곡이 지은 은월암이 정상 석 뒤에 새겨져 있었다.
그 시조 속에는 자연을 바라보던 옛사람들의 감성이 담겨 있다.

호방한 하산길은 한결 가벼웠다.
태화강을 가로지른 은하수 다리를 건너는 묘미는 또 다른 추억을 남겼다.


오산광장을 지나 무지개 분수정원에서 기념사진을 남기며 십리대숲 속 은하수길을 걸었다.
십리대숲 속으로 들어서자 또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하늘을 덮은 긴 왕대나무 숲속을 걸었다.
특히 바람에 부딪히는 댓잎의 맑은소리와 호방한 은하수길은 압권이었다.


공기의 비타민인 음이온이 다량 발생한다.
신경안정과 피로 회복 등 병에 대한 저항성을 키우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대나무 군락 사이를 지나며 키를 재어보거나, 몸을 비집고 지나가는 작은 놀이가 흥미를 자아냈다.
대나무 잎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소리는 맑고도 단단했다.
그것은 자연이 들려주는 가장 정직한 음악이었다.




봄꽃이 피어나는 태화강국가정원을 가로질렀다.
생태, 대나무, 계절, 수생, 참여, 무궁화 등 6개의 주제를 가진 20개의 테마 정원이 있다.

총공사비 1,196억 원을 들여 2004년에 시작해 2010년에 완공했다.
실개천과 대나무 생태원, 야외공연장, 제방 산책로 등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친환경 생태공원이다.
여의도의 2.3배에 달하며 물과 대나무, 청보리, 유채 등이 어우러진 전국 최대 도심 친수공간이다.
생태와 계절, 물과 사람, 시간이 어우러진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길이 120m, 폭 5~8m인 십리대밭교를 건넜다.
디자인 공모를 통해 선정된 다리로, 고래와 백로를 형상화한 아치교다.
총 62억여 원을 들여 2009년에 완공되었다.

행사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축제의 열기는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함께 나누는 점심, 이어지는 노래와 웃음, 그리고 서로를 향한 응원.
그것은 오락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지나온 시간을 기념하는 방식이었다.
함께 웃었던 기억, 함께 견뎌냈던 시간, 그리고 함께였기에 가능했던 성장.
그것들이 우리를 다시 이 자리로 이끌었다.

국립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에서의 3년, 그리고 기숙사에서의 공동생활은 학창 시절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로의 삶에 깊이 각인된 하나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흩어지지 않을 것이다.
잠시 흩어졌다가도 ‘동창’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모일 것이다.

그리고 삶이란, 결국 다시 만나기 위한 긴 여정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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