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모음

붉은 철쭉 능선, 일본 구중산에 오르다

在綠 2026. 6. 20. 17:30

 

지난 6월 17일부터 19일까지 울산 모두리산악회와 함께 일본 큐수 구중산을 다녀왔다.

아름다운 추억을 아로 새긴 구중산 철쭉 이야기를 포스팅한다.

 

 

부산항의 불빛이 밤바다 위로 길게 번졌다.

부산항대교의 불빛은 바다 위에 유장한 길을 만들어 놓았다.

 

그 바다에는 천년 세월의 희로애락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1030, 부산을 출항한 뉴카멜리아호는 거친 대한해협 물살을 헤치며 일본 규슈를 향해 나아갔다.

 

 

대한해협은 백제의 왕인과 아직기가 문화를 싣고 건넜던 길이었고, 조선통신사가 평화를 전하던 길이었다. 임진왜란의 왜군이 이 바다를 건너왔고,

 

 

일제강점기에는 강제로 징용에 끌려간 조선 청년들의 눈물이 물길에 스며들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유학생들도 이 바다를 건넜으며, 극작가 김우진과 성악가 윤심덕은 사랑의 마지막을 이 바다에 맡겼다. 대한해협은 기쁨과 슬픔, 만남과 이별을 모두 품은 채 오늘도 말없이 출렁이고 있었다.

 

 

함께한 산악회원들은 웃음과 담소로 여행의 설렘을 나누었다.

누군가는 갑판에 서서 끝없이 펼쳐진 밤바다와 여행자만이 아는 속삭임을 나누었다.

 

쉼 없이 밀려오는 파도 소리는 거대한 생명의 숨결처럼 밤바다를 울렸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역사는 흘러가도 바다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후쿠오카 하카타항에 도착한 일행은 산행팀과 관광팀으로 나뉘었다. 내가 향한 곳은 규슈를 대표하는 화산군인 구중산이었다.

 

아홉 개의 봉우리를 품은 구중산은 일본 100대 명산 가운데 하나로, 활화산이 빚어낸 웅장한 능선과 광활한 철쭉 군락으로 이름난 산이다.

 

 

버스는 두 시간 반 동안 규슈의 좁고 깊은 산속을 달렸다.

구중마을은 산골답게 소박했고, 산마다 삼나무와 편백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그 나무를 삶의 터전으로 가꾸어 온 흔적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핵폭탄의 폐허를 딛고 숲을 일군 일본인들의 시간이 산자락마다 스며 있는 듯했다.

 

 

산행의 들머리는 작은 주차장과 편의점이 있는 마키노토 고개였다.

해발 1,330m에서 시작해 정상까지는 고도 차가 450m 남짓이었다.

 

 

첫 오르막은 예상보다 가팔랐다.

고도로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즈음 팔각정에 오르자 시야가 열렸다.

 

 

겹겹이 이어진 산줄기는 파도처럼 밀려왔고, 골짜기에서는 온천의 흰 김이 피어올라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땅속 깊은 곳에서 화산이 아직도 숨 쉬고 있음을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구쓰가케산(1,503m) 능선에 올라서는 순간, 산의 중턱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능선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꽃의 바다였다.

 

 

붉은 철쭉은 산허리를 넘실대는 파도였고, 회색 화산암은 그 물결을 떠받치는 거대한 섬이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꽃물결은 살아 있는 생명처럼 출렁였다.

 

 

황홀한 선경이라 아무 말도 은유도 할 수 없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절경, 붉게 타오르는 철쭉을 바라보는 순간, 내 안에서도 설렘이 피어났다. ', 이 풍경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왔구나.' 말이 절로 나왔다.

 

 

평원처럼 펼쳐진 능선에는 나무가 거의 없었다.

대신 화산석과 돌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한 시간 전 내린 비에 젖은 바위는 미끄러웠고 길은 예상보다 험했다.

노란 페인트와 밧줄이 아니었다면 길을 잃기 쉬운 곳이었다.

그러나 힘겨운 발걸음도 철쭉을 바라보는 순간마다 신기하게 가벼워졌다.

 

 

정상을 향하는 길에는 산안개가 밀려왔다가 이내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사방은 순식간에 흰 장막 속으로 숨어 버렸다가 바람 한 줄기에 거짓말처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안개가 걷히고 피어나기를 반복하는 풍경은 자연이 거대한 휘장을 열고, 닫는 공연 같았다.

 

 

바람 끝에는 은은한 유황 냄새가 실려 왔다.

뜨거운 불을 품은 땅 위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난다는 사실은 경이였다.

 

 

대자연은 서두르지 않았고, 아름다움은 기다리는 사람에게만 모습을 내어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구주산 정상에 오르자 구중산의 봉우리들이 사방으로 펼쳐졌다.

 

 

봉우리마다 철쭉이 붉게 번져 있었고, 멀리 홋쇼산은 유황으로 누렇게 물든 사면을 드러내고 있었다. 생명을 품은 붉은 꽃과 불의 흔적이 하나의 풍경 속에서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하산길, 다섯 명은 약속이라도 한 듯 최고봉 나카다케(中岳)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험준한 바위를 지나 거대한 분화구 앞에 섰다.

 

 

그 안에는 하트 모양의 산정호수가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먼 옛날 용암이 들끓던 자리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물빛은 맑았다.

호수에는 하늘과 철쭉 능선, 그리고 우리의 모습이 고스란히 비치고 있었다.

 

맑은 호수를 들여다보는 동안 마음이 맑아졌다.

여행은 낯선 곳에서 잊고 지냈던 나를 다시 만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불길이 지나간 자리, 상처를 견뎌낸 땅일수록 아름다운 생명을 피운다는 사실을 구중산은 보여주었다. 잠시 안개가 산길을 삼켜 방향을 잃기도 했지만, 안개가 걷힐 때마다 철쭉은 다시 붉게 피어났다.

 

 

살아오면서 나 또한 여러 번 안개 속을 걸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 길을 잃었다고 생각한 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면 그것은 지나가는 안개였다.

 

철쭉은 안개가 걷힐 때마다 다시 꽃을 피웠고, 사람 또한 시련을 견딘 자리에서 다시 자신의 꽃을 피워낸다. 구중산은 아름다운 풍경보다 먼저 삶을 가르쳐 준 산이었다.

 

 

6시간, 21천 걸음. 산행은 끝났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그 붉은 능선을 걷고 있었다.

돌아오는 배 위에서 바라본 대한해협.

 

 

떠날 때는 역사의 상처만 보였던 바다가 수많은 아픔을 품고도 잔잔한 얼굴로 출렁이고 있었다. 상처는 지우는 일이 아니라 품고 살아가는 일이라는 사실을. 대한해협도, 구중산도 그 상처를 감추지 않았다. 뜨거운 불을 품은 화산이지만 해마다 붉은 철쭉을 피워 올리고 있다.

 

 

구중산의 철쭉은 내게 아름다운 풍경 이상의 의미였다.

그것은 뜨거운 시간을 견뎌낸 생명의 언어였고, 역사를 기억하는 이방인에게 건네는 조용한 위로였다. 나는 붉게 물든 철쭉 능선을 오래도록 마음속에 접어 둔 채 바다를 건너왔다.

 

 

내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구중산의 붉은 능선이 남아 있었다.

이국의 절경이요 상처를 견뎌 꽃을 피워내는 삶의 모습이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힘겨운 시간을 만날 때마다 그날의 붉은 철쭉을 떠올릴 것이다.

꽃은 가장 뜨거운 땅에서도 피어난다는 사실을 오래도록 내게 가르쳐 줄 것이기 때문이다.

 

 

함께한 일행, 노고가 많았던 임원들에게 감사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