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모음

역사의 흔적을 따라 대마도를 걷다

在綠 2026. 6. 25. 23:10

 

여행은 풍경을 보러 떠나지만, 돌아올 때는 풍경에 스며 있는 시간을 품고 온다.

대한해협 건너 대마도가 그런 섬이다.

 

 

두 마리 말이 마주 보는 형상에서 유래했다는 이름처럼,

오랜 세월 한일이 운명처럼 마주해 온 섬이다.

 

 

울산불교문협 제39차 성지순례 12일 여정에 참가했다.

하여 역사의 상흔이 있는 섬을 걸으며 자아를 발견하고 싶었다.

 

 

부산항을 출발한 초고속 여객선 NOVA호는 파고 2m가 넘는 거친 파도에 심하게 흔들렸다이 물길은 긴 세월 사람과 문물, 희망과 욕망, 교류와 침략이 오간 길이었다.

바다의 그 침묵 속에는 인간사의 수많은 이야기가 응축되어있는 듯했다.

 

 

배는 1시간 30분 만에 최북단 이타카츠항에 닿았다.

부산에서 49.5km 떨어져 있어 후쿠오카보다도 가까웠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상하 두 섬이 다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면적의 90%가 숲으로 덮여 있었다. 900km가 넘는 리아스식 해안은 에메랄드빛 바다와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를 펼쳐 놓은 듯했다.

 

대마도의 매력은 오랫동안 문화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온 점이었다.

가야와 신라의 철기 문화가 건너갔고, 백제의 불교와 유학 또한 이 섬을 거쳐 일본으로 전해졌다.

 

반면 왜구의 근거지가 되어 조선을 끊임없이 괴롭히기도 했다. 침략의 전초기지였던 대마도는 역사의 명암, 화해와 갈등의 흔적을 품은 오묘한 섬이었다.

 

 

행정 중심지인 이즈하라로 가는 길에 최북단 와니우라 한국 전망대에 올랐다

비와 안개가 짙어 부산은 보이지 않았다.

맑은 날이면 해운대 엘시티와 광안대교까지 바라볼 수 있다고 했다.

 

 

비록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바다 건너 고국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뭉클해졌다. 전망대 아래로는 산과 만, 크고 작은 섬들이 겹겹이 포개져 수묵화 같은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전망대 곁에는 조선역관사위령비가 있었다.

조선통신사 일행 가운데 역관 108명이 폭풍우로 목숨을 잃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절경 앞에서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이 섬 곳곳에 역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2시간을 버스로 달려 도착한 이즈하라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대마도 인구가 한때 8만 명이 었는데 이제 3만 명 이하로 감소한 탓인지 골목은 적막했다.

 

 

에도시대 대화재 이후 방화를 막기 위해 쌓았다는 높은 돌담은 세월의 풍상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었다. 그것은 오래된 역사서를 한 장 넘기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카라이 토스이 생가터 기념관이다.

춘향전을 번역하여  일본 신문에 연재한 소설가, 기자다.

 

일본 독자에게 한국문학과 문화를 알리는 계기를 만든 인물이다.

여성 소설가로 5천엔에 나오는 하구치 이치요의 스승이다.

 

 

사무라이 거리에는 대마도 번주 소 요시토시의 동상이 있었다.

조일 외교의 최전선에 섰던 소씨 가문의 무덤들이 있다. 

 

임란 때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섰으나 전쟁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 명령으로

조선과 국교회복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며 대마도의 영웅이다.

 

 

일본에는 약 8만 개의 신사가 있다고 한다.

그중 하치만구 신사는 임진왜란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 부인 마리아와 아들 영혼을 기리는 곳이다. 고니시는 일본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해 참수되었다.

 

 

입구에는 삽살개를 닮은 상과 사자상이 서 있었는데, 하나는 입을 벌리고 다른 하나는 입을 다문 채 삶의 시작과 끝을 상징한다고 했다.

생과 사, 만남과 이별이 한 공간 안에 공존하고 있었다.

 

 

신사는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일본 특유의 신앙 공간이었다.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신에게 화복을 기원하고 삶의 크고 작은 일을 맡긴다. 그 과정에서 상처를 위로받고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신사는 삶을 치유하는 성소처럼 느껴졌다.

 

 

 

가네이시성의 고려문은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던 상징적인 장소다.

1607년 이후 조선통신사들은 이 문을 지나 일본으로 향했다.

 

 

국분사 경내에 세워진 조선통신사 접우지비앞에 섰을 때는 감회가 남달랐다.

한때 칼을 겨누던 두 나라가 사신을 오가며 문화와 우정을 나누었다는 아이러니.

역사는 갈등과 화해와 교류의 기록임을 증명했다.

 

 

이번 여정에서 마음에 남은 인물은 덕혜옹주였다.

대한제국의 황녀였던 그녀는 나라를 잃은 시대의 비극을 감당해야 했다.

 

 

정략결혼을 하고, 딸 정혜를 잃었으며, 정신질환과 이혼의 아픔까지 겪었다

성안에 세워진 결혼봉축기념비를 바라보며 돌에 새겨진 글자보다

그 뒤에 숨겨진 한 여인의 기구한 운명이 먼저 읽어졌다.

 

 

이즈하라 골목 개울가 벽면에 그려진 조선통신사 행렬도는 마치 그때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신 들려주는 듯했다. 번화가라 불리는 거리에도 사람 그림자는 드물었다.

관광객을 위한 면세점과 슈퍼마켓만이 눈에 띌 뿐이었다.

 

 

수선사에서 만난 면암 최익현 선생 순국비는 절로 숙연해졌다.

항일 의병을 일으킨 죄목으로 대마도에 유배된 선생은 끝내 단식으로 순국했다. 왜국의 물 한 모금조차 거부하며 지켜낸 절개는 칼보다 강한 신념이 무엇인지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었다.

 

 

다음 날 이타카츠항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관교에 섰다.

섬을 인위로 갈라 일본 해군이 군사용으로 만든 수로 위에 놓인 다리였다.

 

 

·러 우호 언덕에 세워진 기념비는 과거의 전쟁과 갈등을 넘어 새로운 관계를 염원하는 상징처럼 보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관광 명소가 된 풍경 속에서도 전쟁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여행의 마무리는 자연이 장식했다.

7km에 이르는 슈시 편백 숲길에는 초여름의 피톤치드가 묵직했다.

 

높이 뻗은 편백과 삼나무 사이로 바람이 흐르고,

가랑비는 숲의 향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미우다해수욕장의 에메랄드빛 바다는 남태평양의 휴양지를 떠올리게 했다. 아름다운 자연은 그렇게 역사의 상처를 너그럽게 품어 안고 있었다.

 

 

귀국길 대한해협에는 파고 3m에 가까운 파도가 일었다.

배는 세차게 흔들렸고, 창밖으로 보이던 대마도의 산들은 서서히 시야에서 멀어졌다.

 

두 마리 말이 서로를 마주 보듯 한국과 일본도 오랜 세월 대립과 화해를 반복해 왔다. 대한해협의 물결처럼 관계 또한 끊임없이 출렁일 것이다. 그러나 공동번영을 향할 물길이기도 하다.

 

 

대마도는 과거를 기억하게 하고, 현재를 성찰하게 하며, 미래의 공존을 알려준 살아 있는 역사서였다. 그 길을 걸으며 풍경보다 의미 있는 것이 역사이며,

역사보다 더 깊이 남는 것은 그 역사를 마주한 사람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새겼다.